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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 축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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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구단의 두 번째 후신에 대한 내용은 상주 상무 FC 문서
, 현재의 상무 축구단에 대한 내용은 김천 상무 FC 문서
참고하십시오.1. 개요[편집]
1984년에 창단한 과거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소속의 축구단이다.
2. 시즌별 일람[편집]
3. 역사[편집]
자세한 내용은 김천 상무 FC/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본래 대한민국의 주요 3군인 육군, 공군, 해군이 각각 자체적으로 축구단을 운영해 왔다.[1][2] 이 3군 축구단을 하나로 통합해 1984년 국군체육부대 예하 부대로 재창단 된 팀이 바로 상무 축구단이다. 상무 축구단은 창단 원년인 1984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을 우승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했고, 당시 기준에 따라 1985년 시즌 프로축구리그인 '축구대제전(수퍼리그)'에도 참가 자격을 얻어 프로 리그에 데뷔까지 했다.[3] 다만 한 시즌만을 소화하고 다시 1986년부터 실업축구 무대로 돌아와 2002년까지 전국실업축구연맹전을 소화했다. 특히 90년대가 상무의 전성기로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추계대회에서 4년 연속 우승하고, 1999년과 2001년 '전국실업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하는 등, 본격적으로 이 때부터 실업 축구의 강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2002년에 상무 1군이 광주와 연고 협약을 맺어 2003 시즌 K리그부터 광주 상무로 다시 K리그에 참가했다. 또한 2군은 이천 상무라는 이름으로 2003년에 창설된 내셔널리그에 원년팀 중 하나로 따로 참가하기 시작해[4] 2003 시즌 준우승을 하기도 했다. 이후 이천 상무는 2005년까지 활동했다가 2006년부터 K리그 2군 리그로 무대를 옮겨 활동했다.[5] 2011년 부터 광주시에 광주 FC라는 독자적 시민구단이 창단되고 상무는 상주시로 이전하면서 상주 상무로 재탄생했다. 상주에서 10년간 활동한 뒤 2021년 부로 김천시로 이전, 현재의 김천 상무가 되었다.
대한민국 4대 프로 스포츠 리그에 참가하는 유일한 체육부대 구단이다.[6]한국프로축구연맹의 공식 기록에서는 상무 축구단, 광주 상무, 상주 상무, 김천 상무를 모두 별개의 구단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기록도 모두 분리되어 있다. 그 이유는 상무(국군체육부대)는 선수 공급처일 뿐 광주광역시, 상주시, 김천시 등 지방자치단체가 구단 운영 주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성적이 보잘 것 없는 무명 선수나 슬럼프에 빠진 선수들을 당당한 주전급으로 훌륭하게 육성하여 기회의 장이라고도 불린다. 상무 축구단은 크게는 국군체육부대에 속해있기 때문에 다른 종목 선수들과의 교류가 많으며, 여기서 자칫 선수생활을 하며 소홀히 할수 있던 부분을 타 종목과 비교하며 발견해 단련할 기회가 많다. 전역할때가 되면 입대 전보다 여러 면에서 성장한 선수가 돼서 돌아오는 경우도 꽤 잦다.
4. 성적[편집]
여타 팀들이 스카우터들을 고용해서 열심히 선수를 발굴하고 설득하고 원소속팀과 협상을 벌여 이적료를 지불하면서까지 어렵게 선수를 영입해 오는 것은 물론 수준급의 외국인 선수 영입 시도도 적극적으로 하는 것과는 달리 이 팀은 군인팀으로, 국가의 권한인 징병제로 연령 제한인 만 27세까지의 선수가 알아서 충원된다. 축구선수의 전성기는 통상 만 23세부터 30세까지지만, 징병의 부작용으로 선수들이 상무와의 계약 기간 동안 열심히 뛰기보다는 적당히 뛰면서 부상당하지 않고 무사히 원소속팀으로 방출[7] 당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K리그1 하위권 단골팀이었다. 게다가 군대라는 팀의 특수성으로 인해 선수들은 훈련뿐만 아니라 이 나라를 지키는 일도 병행해야 하고, 또한 군팀 특성상 전력도 자주 바뀌고 말이다.
5. 신분[편집]
병역 특례가 걸려있는 대회에서 선수들이 삽질을 하거나 졸전을 펼치면 상무나 가라는 욕설을 얻어먹는 경우가 있는데, 정작 프로축구 선수들 사이에서는 축구도 하면서 병역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 팀에서 뛰는 것이 누구든지 간절하게 원하는 꿈이다.[8]
급여도 일반병과 다를 바가 없는 진짜 군인이다. 농담이 아니라 전역이 가까워진 말년병장 선수들의 몸은 무겁기 그지 없다.[9] 선수들이 말년에 빠진 모습을 보이는 것도 광주 시절의 축구팬들이 상무를 싫어하던 이유다. 다만 최근의 조규성처럼 상무에서 포텐을 터뜨려 국가대표 승선과 월드컵 출전이 눈앞에 다가온 선수들은 예외다. 조규성은 실제로 전역전 휴가 전 치른 마지막 상무 고별전에서 골을 넣으며 끝까지 잘했다.
한편 여자 축구 리그에도 상무가 참여하고 있는데, 보은 상무 참조. 다만 이 쪽은 여자팀이기 때문에 당연히 용사 입대가 아니라 부사관 임관이다. 참고로 선수단 규모가 국군체육부대 중에서 큰 편인데, 이유는 다른 종목 TO를 끌어다 썼기 때문. 이 쪽은 부사관 신분이기 때문에 병역의무복무기간만 지나면 원 소속팀으로 임대 해제가 되는 남자팀과는 달리 계속 눌러앉을 수 있다. 그에 따라 계급도 중사 - 상사 등으로 계속 올라간다.[10]
참고로 외국에도 상무와 비슷한 팀이 있는데, 태국의 에어 포스 센트럴 FC로, 과거 한국에 태국 공군팀으로 알려진 구단이다. 현재 워리어스 FC로 개명한 싱가포르 리그의 싱가포르 암드 포스도 군인팀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이 두 구단은 현재 명칭에 군대물만 남아 있을 뿐, 프로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고, 용병 선수도 쓰고 있다. 한국인 선수들도 몸담았던 적이 있다.
아프리카 알제리의 경우 선수가 징병 되면 프로팀으로 임대를 보낸다. 보통 원소속팀에 뛰게 하는 경우가 많고, 이 경우에 연봉은 군대에서 낼름했다. 세계 군인체육대회를 할 때면 이렇게 임대 보낸 선수들을 일단 군인 신분이란 이유로 차출해서 대표로 보내는데, 그 때문인지 굉장히 강하다.
이 밖에 과거 공산권 국가들은 군경 구단이 많았으나, 현재는 해체되었거나 프로 구단으로 전환하였거나 정규 리그에는 참가하지 않는다. 단 베트남은 비엣텔이나 꽁안난단 등 군경팀이 프로에 참여하고 있다. 공산권 문화가 남아 있는 북한에서는 여전히 리그에 군 구단이 많다.
6. 연고지 변천[편집]
광주광역시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개최 도시로 선정되었으나, 당시 무등경기장 종합운동장말고는 변변한 종합운동장조차 없었다.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월드컵을 치르기 위해선 제대로된 축구장 신축이 필요했고 결국 광주월드컵경기장이 완성되었다. 전국에 5개 구장만 지어도 월드컵은 치룰 수 있는데 축구계와 각 지자체들은 이를 기회로 인프라 구축을 하려고 했고, 일본도 인프라 투자를 하고 있어서 결국 10구장이 지어진 것이다. 문제는 구장은 있는데 연고 프로축구단이 없었던 곳이 여러곳이었고 광주 또한 그러하였다. 경기장은 항상 유지비용이 발생하는데 활용을 못하면 세금낭비가 되버리니 연고 프로 구단이 없는 구장을 소유한 지자체들은 프로 축구단 창단 압박을 받았다. 또한 2002년 월드컵 열기로도 전국에서 단 한 개의 기업 구단이 창단되지 않았다. 광주광역시는 궁여지책으로 돈 안드는 상무를 광주로 입성시킬 준비를 했고 이에 광주의 축구 팬들은 크게 반발한다.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당시 박광태 광주시장은 "상무를 6년 동안만 도와주면 상무와의 연고 협약이 끝나는 2008년 말에는 프로 구단을 창단하겠다"고 약속했다. 광주광역시의 축구팬들은 6년만 버티면 진정한 자신들의 프로축구단이 생긴다는 기대심을 가지고 상무를 응원했다.
6년이 지난 2008년. 연맹은 상무를 충청남도 천안시로 옮기려 했으나 광주광역시가 지금은 프로축구단을 못 만들겠다고 하는 바람에 상무는 2년 더 광주에 남게 되었다. 광주광역시가 약속을 어기자 대표 서포터스 클럽인 1980은 2008년 10월을 끝으로 응원을 중단한다. 이 시절 광주의 스포츠 팬이면 반드시 믿지 말아야 할 두 가지가 있다는 우스갯 소리가 돌았다. 하나는 야구장, 다른 하나는 프로축구단. 전자는 삽 뜨기 전에 믿으면 안 되고 후자는 선수 뽑아서 창단식 열기 전까지는 절대 믿으면 안 된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로 팬들은 지쳐 있었다. 이 기약없는 약속 두개는 2010년에야 지켜졌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광주광역시는 경기장만 빌려 주는 곳이었지 진정한 연고지라고 보기는 어려운 편이다. 2013년 9월까지 국군체육부대는 경기도 성남시에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선수들은 평소엔 성남에서 지내다 홈경기를 치르기 위해서 광주로 원정을 와야했다. 즉 성남시에서 열리는 경기를 제외하곤 다 원정 경기나 다름없었다.[11][12] 광주시도 시한부 연고라고 못박았고 서포터즈도 시민구단 창단을 전제를 '시한부 응원'을 했으니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의 충청도 시절같은 '임시 연고'였다.